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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지난 이야기/생각조각

시간과 능력,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늘 전교 10등 정도 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말하기를 "난 하루에 한 시간만 더 공부하면 전교 1등 하는 애들보다 잘 할 수 있어." 라고 했었다. 이때 나도 이 친구가 말하는 '전교 1등 하는 애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친구가 나보다 시험을 잘 본다고 해서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 넘겼었다. 하지만 왠지 잘 잊혀지지는 않는 말이되어서 10년이 넘게 지나도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전교 1등을 못 해본 한이 담긴 말이어서였을까?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이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12345 곱하기 12345 를 계산하는데 1분이 걸리는 사람과 10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이 두사람은 모두 이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이 둘에게 똑같이 이 문제를 푸는데 1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둘은 모두 이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둘에게 5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두번째 사람은 이 계산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결국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12345 곱하기 12345와 비슷한 계산이 100번 들어가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첫번째 사람은 이 문제를 두시간 정도 걸려서 풀 수 있지만 두번째 사람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17시간, 즉 하루를 꼬박 써야한다. 너무 어거지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고시공부를 위해서 민법총론이라는 책을 읽는다고 해보자. 고시생 '가'와 '나' 가 있다고 해보자. 고시생 '가'는 한자말 하나를 보는데 0.1초가 걸린다고 하자. 고시생 '나'는 한자말 하나를 보는데 5초가 걸린다고 해보자. 민법총론 한쪽에 한자말은 평균 100개 있다고 생각하고, 책은 1000쪽짜리라고 해보자. 그러면 고시생 '가'의 경우 민법총론에 있는 한자말을 보는데 10000초, 즉 세시간 쯤 걸린다. 고시생 '나'의 경우는 같은 일을 하는데 500000초, 139시간이 걸린다. 물론 한자말을 다 볼 수 있더라도 민법총론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나'의 경우는 하루에 세시간씩 한자만 봐도 45일, 즉 한달 반이 걸리니 민법총론을 이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이런경우 고시생 '나'는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는 것이 현명하리라.

실제 문제에 좀더 가깝게 하려면 이렇게 바꿔보면 된다. 앞의 보기에서 민법총론이라는 책은 한번에 10쪽은 읽어야 이해가 되는 책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실제 상황에서 그런 경우는 많기 때문에 이 가정은 충분히 타당하다. 또 한가지를 더 가정해서, 책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 쪽의 한자말을 보는데 걸리는 시간의 5배라고 해보자. 이 가정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렇다면 '가'의 경우는 10쪽을 읽는데 0.1 * 100 * 5 * 10 = 500초, 즉 8분이 좀 넘게 걸린다. '나'의 경우는 10쪽을 읽는데 5 * 100 * 5 * 10 = 25000초, 즉 417분, 7시간이 걸린다. 이런 경우 '나'는 10쪽을 이해하려면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7시간 동안 책을 읽어야한다. 그럼 그 다음 10쪽을 이해할 수 있을까?

386 컴퓨터에서는 되지 않는 오락이 펜티엄에서는 된다. 얼마나 빨리 계산할 수 있는가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 실제로 386에서 윈도우 XP를 돌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포기하라고 말할 것이다.

시간의 문제가 더 치명적인 경우가 되는 때도 있다. 바닷가에 다다르기 10 km 전에 배가 부서졌다고 해보자. 100 m를 1분에 수영하는 사람은 100분 동안 목숨을 걸고 수영해서 바닷가에 도착하겠지만 100 m 를 5분에 가는 사람은 과연 여덟시간이 넘도록 수영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맨처음 말했던 그 친구. 그 친구는 과연 하루에 한시간씩 더 공부할 수 있었을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전교 1등을 하고 있던 사람은 하루에 5분만 더 공부하면 그 친구의 한시간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 친구가 전교 1등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왜 이런말을 하는가?

나도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른이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하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 과연 내가 그 일을 하는데는 얼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써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한다.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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