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지난 이야기/생각조각
'말이 살아있다'는 뜻은
(gguro)
2004. 2. 22. 11:48
'말이 살아있다'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말이 살아있다는 말은 그 말이 실제 사건이 되어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자"라는 말이 살아있으려면 그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야한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죽어버리게 된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살아있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살아있게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중에 전화할게" 라고 말했다면 이 말을 살아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답 메일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말을 살아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즉 그 메일을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말을 내가 살려주어야 할 때가 생긴다는 말이다. 나와 나의 짝꿍이 만났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집으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한다. 나의 짝꿍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 전에 이 닦고 발 씼고 자세요~" 나는 이를 닦을 수도 있고 안 닦을 수도 있다. 나의 짝꿍은 내가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를 닦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짝꿍이 한 말을 죽이는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인다고 교회에서 배운다. 실제로 그렇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생겼다. 빛이라는 녀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서 그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대부분의 말씀은 사람에게 한 것이다.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누구나 다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든 사람이다. 그 사람 속에는 저 말씀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말씀은 죽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 많은 말 가운데 적은 부분만을 살려나가고 있다. 실제로 다 살려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살아있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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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말의 뜻은 다른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것은 조건문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네가 이렇게 하면 너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이 땅에서 오래 살고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이 그 보기가 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실제로 이 땅에서 오래살고 복을 받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고 이것을 살아있도록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즉 오래 살도록 하실 수 있고 복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게 된다는 말을 쓴 것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말이 살아있다는 말은 그 말이 실제 사건이 되어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자"라는 말이 살아있으려면 그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야한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죽어버리게 된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살아있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살아있게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중에 전화할게" 라고 말했다면 이 말을 살아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답 메일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말을 살아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즉 그 메일을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말을 내가 살려주어야 할 때가 생긴다는 말이다. 나와 나의 짝꿍이 만났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집으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한다. 나의 짝꿍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 전에 이 닦고 발 씼고 자세요~" 나는 이를 닦을 수도 있고 안 닦을 수도 있다. 나의 짝꿍은 내가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를 닦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짝꿍이 한 말을 죽이는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인다고 교회에서 배운다. 실제로 그렇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생겼다. 빛이라는 녀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서 그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대부분의 말씀은 사람에게 한 것이다.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누구나 다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살아있도록 만든 사람이다. 그 사람 속에는 저 말씀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말씀은 죽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 많은 말 가운데 적은 부분만을 살려나가고 있다. 실제로 다 살려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살아있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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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말의 뜻은 다른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것은 조건문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네가 이렇게 하면 너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이 땅에서 오래 살고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이 그 보기가 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실제로 이 땅에서 오래살고 복을 받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고 이것을 살아있도록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즉 오래 살도록 하실 수 있고 복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게 된다는 말을 쓴 것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